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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18:51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


1244(고종 31)~1321(충숙 8).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 문하평리 핵(翮)의 둘째 아들이고 명상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체구(體軀)가 컸고 관홍(寬弘)하였으며 백가(百家)에 널리 통하고 운(韻)을 부르는 즉시 시를 지으므로 상서(尙書)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다음 1298년(충렬왕 24) 사림원(詞林院)에 들어갔는데 학사 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권영(權永) 등과 함께 왕이 홍정(붉은 가죽 띠)을 내렸다.
충렬왕이 친시(親試)로 문신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아우 세기(世基)와 함께 2등과 3등에 뽑히어 그때 사람들이 ‘천장급제(天場及第)’라고 칭송하였다.
뒤에 기거중서사인을 거쳐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일소하고 학교를 일으켰다. 다시 군부총랑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 우사의대부사림원학사시우산기상시(右司議大夫詞林院學士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밀직승지가 되었고 1303년 전법판사에 이르렀으며 1307년(충렬왕 33)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하여 실행하였고 정당문학을 거쳐 상의도첨의사사찬성사가 되었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이르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1320년 회갑에는 아들 제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와서 헌수(獻壽)를 하고 전왕(前王)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니 모두 광영스럽게 여겼다.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시와 술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선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는 ≪동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진(李瑱)

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
고려후기 상의도첨의사사찬성사, 검교첨의정승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초명은 이방연(李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손으로, 이제현(李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에 박통하고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이 되었다가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摠郎)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 시우산기상시(右司議大夫詞林院學士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贊成事)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진사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이제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아들 이제현의 세력에 의지하여 남의 노비를 탈취한 것이 많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과 시와 술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東庵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6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