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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명우(李明雨)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9. 00:00

영화감독 이명우(李明雨)


1901~? 촬영기사*영화감독

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이며 녹음기사인 필우(弼雨)이다.

게성학교(桂成學校) 졸업 후에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하여 촬영기술을 배웠다.

1927년 김해운(金海運) 감독의 <운명>을 촬영하여 영화게에 데뷔했고 <월남 이상재선생 장례 실황>(1927년)을 감독, 촬영, 편집까지 맡아서 성공리에 마쳤다. 1930년 이영구(李龜永) 감독의 <아리랑, 그뒤의 이야기>를 촬영, 편집하고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인 <방아타령>(1931년. 감독 김상진(金尙鎭)),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 감독 이규환(李圭煥)) 등을 촬영하였다.

193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경성촬영소)의 감독*촬영*편집을 맡았고 형 필우는 녹음*현상*조명을 맡았다. 그의 감독 작품으로는, <홍길동전 후편>(1936)*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등이 있다.

1937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탠버그는 그가 촬영한 <장화홍련전>(1936)을 보고 촬영기법이 매우 높다고 칭찬하였다.

광복후에 영화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6.25동란 때에 최인규 감독과 함께 납북되었다.

그는 무성*발성의 도입기에 한국영화의 촬영과 녹화, 녹음의 기술적 측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한 거장이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명우(李明雨)

1901년 (서울 을지로)~?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조선의 영화감독이자 촬영감독으로,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의 감독을 맡았으며, 경성영화촬영소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생애와 이력
이명우 LEE Myeong-u 李銘牛 (1901~?)

일제 강점기 조선의 감독 및 촬영감독. 1901년 서울 을지로에서 출생했으나, 사망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인 이필우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형과 함께 촬영과 현상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성장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시계 점포를 운영하던 상인이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형 이필우는 유년 시절부터 사진 재료와 축음기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계성학교(桂成學校)를 졸업한 이후,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촬영 기술을 습득했다. 1927년에 그는 두 작품을 촬영하였다. 한 작품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자신이 각본․촬영․편집․현상․감독한 〈월남 이상재 선생 장례식 실황〉이었다. 다른 작품은 조선영화제작소 제작, 윤백남 각색, 전해운 감독의 〈운명〉(1927년 12월 15일 개봉)이었다. 이명우는 이 작품의 촬영을 맡으면서 조선의 영화계에 본격 데뷔하였다. 유현목에 따르면 〈운명〉은 “한국의 고답적이고 인습적인 혼사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비극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작품 세계
〈운명〉 이후 이명우는 초창기 조선의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들에서 촬영을 담당했다. 중요한 작품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삼걸인(세동무)〉(1928, 촬영․편집․현상), 〈아리랑 그후 이야기〉(1930, 촬영․편집), 〈철인도〉(1930, 촬영․현상),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촬영), 〈전과자〉(1934, 기획), 〈청춘의 십자로〉(1934, 촬영), 〈아리랑고개〉(1935, 촬영․편집․현상),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 촬영․편집) 등이 그것이다. 이명우는 〈아리랑 그후 이야기〉나 〈철인도〉 등을 촬영하면서 나운규 영화의 스텝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931년에는 카프에 대항하는 영호동호인회의 설립에 가담하여 박정현․나운규․이필우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명우의 행보 중에서 〈전과자〉 이후의 행보는 주목된다. 이명우는 이 작품을 계기로 경성촬영소와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때문이다. 〈전과자〉에서는 기획을 맡았고, 1935년 김소봉 감독과 함께 〈홍길동전〉의 감독을 맡았다가,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의 감독을 맡으면서 조선 영화계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춘향전〉의 촬영, 조명, 음향을 이필우가 담당하면서, 〈춘향전〉은 두 형제의 공에 의해 촬영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명우는 경성촬영소의 〈홍길동전(후편)〉의 감독을 맡기도 했고, 나운규의 역작인 〈오몽녀〉에서 촬영과 편집을 맡기도 했다.

1938년 경성촬영소가 동양극장과 고려영화협회에 공동 인수되면서 제작된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의 감독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때 이필우는 경성촬영소를 떠나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창립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이명우는 이필우가 떠난 자리를 메우면서 고려영화협회의 촬영 감독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약은 최인규 감독의 〈수업료〉나 전창근 감독의 〈복지만리〉에도 확인된다. 특히 이명우는 〈복지만리〉 해외 로케이션에서 크레인 촬영을 하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지원병〉, 〈조선해협〉, 〈병정님〉 등의 친일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광복 후에는 영화계 재건을 위해 애쓰기도 했다. 6‧25 전쟁 무렵, 최인규 감독 등과 함께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의 생사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영화사적 평가
이명우는 이필우와 함께 조선 영화계의 초창기 촬영기사로 널리 알려진 스텝이었다. 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역량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필우가 〈황무지〉 제작 문제로 다른 제작진들과 불화를 일으키고 경성촬영소를 떠난 이후, 경성촬영소를 지키며 기술 유지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영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초기 조선 영화계의 도전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촬영감독으로도 기록될 것이다.

작품 목록
〈월남 이상재선생 장례식 실황〉(al Ceremony of "Weol-nam" Lee Sang-jae (Wolnam Lee Sangjaeseonsaeng janglyesig silhwang), 조선, 1927, 다큐멘터리)
〈운명〉(Destiny (Unmyeong), 조선, 1927, 촬영)
〈창덕궁 순종황제 묘의〉(The National Funeral of King Sunjong at Changdeok Palace (Changdeoggung sunjonghwangje myo-ui), 조선, 1928, 다큐멘터리)
〈삼걸인(세동무)〉(Three Beggars (Three Friends)(Samgeol-in), 조선, 1928, 촬영․편집․현상)
〈아리랑 그후 이야기(아리랑 후편 )〉(Arirang part 2, 조선, 1930, 촬영․편집)
〈철인도〉(Cheol-indo, 조선, 1930, 촬영․현상)
〈승방비곡〉(Sorrowful Song in the Buddhist Monastery (Seungbangbigog), 조선, 1930, 촬영․편집)
〈방아타령〉(A Folk Song of the Mill (Bang-a-talyeong), 조선, 1931, 촬영)
〈수일과 순애〉(Su-il and Sun-ae (Suilgwa sunae), 조선, 1931, 촬영)
〈임자없는 나룻배〉(A Ferry Boat that Has No Owner (Imja-eobsneun nalusbae), 조선, 1932, 촬영)
〈전과자〉(Ex-Convict (Jeongwaja) , 조선, 1934, 기획)
〈청춘의 십자로〉(Turning point of the youngsters (Cheongchun-ui sibjalo), 조선, 1934, 촬영)
〈아리랑고개〉(Arirang Pass (Alilanggogae), 조선, 1935, 촬영․편집․현상)
〈은하에 흐르는 정열(비상)〉(Passion in the Universe (Eunha-e heuleuneun jeong-yeol), 조선, 1935, 촬영․편집)
〈춘향전〉(The Story of Chun-hyang (Chunhyangjeon), 조선, 1935)
〈홍길동전〉(The Story of Hong Gil-dong (Hong Gildongjeon), 조선, 1935, 공동 감독)
〈바다여 말하라〉(Sea, Talk to Me (Bada-yeo malhara), 조선, 1935, 촬영)
〈홍길동전(후편)〉(The Story of Hong Gil-dong part 2, 조선, 1936)
〈노래조선〉(Songs of Joseon (Nolaejoseon), 조선, 1936, 촬영․편집․현상)
〈장화홍련전〉(Story of Jang-hwa and Hong-ryeon (JanghwaHongryeonjeon), 조선, 1936, 촬영․편집․현상)
〈심청전〉(Story of Sim-chung (Sim Cheongjeon), 조선, 1937, 촬영․편집)
〈오몽녀〉(Oh Mong-nyeo (Omongnyeo), 조선, 1937, 촬영․편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Fooled by Love, Hurt by Money (Salang-e Soggo don-e ulgo), 조선, 1939)
〈수업료〉(Tuition (Su-eop-ryo), 조선, 1940, 촬영)
〈복지만리〉(Miles Away from Happiness (Bok-ji-man-li), 조선, 1941, 촬영)
〈지원병〉(Volunteer (Ji-wonbyeong), 조선, 1941, 촬영․편집)
〈조선해협〉(Straits of Chosun, 조선, 1943, 촬영)
〈병정님(兵隊さん)〉(Mr. Soldier, 조선, 1944, 촬영․편집)
〈밤의 태양〉(The Sun of Night (Bam-ui tae-yang), 한국, 1948, 촬영․편집)
〈전우〉(A fellow Soldier (Jeon-u), 한국, 1949, 기획․편집)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94X9214054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