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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23:16

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1642(인조 20)~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군보(君輔)·호는 구천(龜川). 명상 항복의 증손이고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며 좌의정 태좌의 아버지이고 영의정 종성의 조부이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광에 유배되어 5년 동안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78년(숙종 4) 유배에서 풀려나 1680년 창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동몽교관이 되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으로 부임하여 가뭄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과세를 감하여 주고 부역(賦役)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푸는 한편 학교를 일으켜 준재(俊才)를 뽑아 가르쳤다.

이어서 진위현령(振威縣令)을 거쳐 1694(숙종 20년) 김제군수·사복시정․장악원정에 이르고 1696년에 제용감정, 1699년 사헌부 장령, 상주목사에 보임되고 1703년(숙종 23) 삼척부사로 나아가서 선정을 베풀고 자신의 녹봉으로 용산서원(龍山書院)을 세워 후진을 가르쳤다.

1705년에 사헌부 집의를 받고 돌아왔다가 다시 1706년에 충청관찰사로 나갔고 뒤에 공조참의를 받았다. 1711년(숙종 37) 한성부우윤·공조참판·형조참판에 오르고 1718년(숙종 44)에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좌찬성이 추증되었다가 영조 때에 영의정을 추서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논변경설(論辯經說)』·『답문의례(答問疑禮)』20여권이 있으며, 그 가운데『왕조례비지(王朝禮批旨)』는 임금의 특명으로 비각(秘閣)에 소장되었다. 전북 김제의 <용암(龍岩)서원>·전북 익산의 <학봉(鶴峯)서원.·전남 영광의 ,백산(栢山)서원>·강원 동해시의 <용산(龍山)서원> 등 4서원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구천(龜川) 이세필(李世弼)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
조선후기 김제군수, 사복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이시술(李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송시열을 적극 옹호하였다.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하여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퇴계집』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 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 개의치 않고 날마다 『대학』·『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

1722년(경종 2) 아들인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 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4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