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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공(隱庵公) 이수일(李守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23:02

은암공(隱庵公) 이수일(李守一)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영의정 난(鸞)의 아들이고 우의정 완(浣)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 1590년 선전관이 되었고 이듬해에 장기현감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분전했으나 예천·용궁에서 패하였으나 오히려 밀양부사로 승진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도 수군정도사에 올라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가선대부가 가자되었다.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로 보임되었으며 다음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6년에 다시 길주목사에 방어사를 겸하였으며 수원부사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11년 지중추부사로 포도대장을 겸하였고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에 다시 지중추부사로 복직하였고 1616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출전하여 길마재(鞍峴)에서 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를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졸(卒)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수일(李守一)

1554년(명종 9)~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조할아버지는 주부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오(李塢)이고,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생원 이자침(李自琛)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월성부원군 이난(李鸞)이고, 어머니는 참봉을 지낸 우담령(禹聃齡)의 딸 단양우씨이다. 아들은 효종 때 우의정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던 이완(李浣)이다.

1554년(명종 9) 충주에서 태어난 이수일(李守一)은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북방 지역 근무를 마친 후 1584년 권지훈련원봉사, 1586년 삼수소농보권관, 1590년(선조 23) 선전관을 지냈다. 장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장기현을 공격하는 왜군과 격전 끝에 후퇴하였으나 왜군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후 함창(현 상주시 함창읍) 당교(唐橋)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593년 밀양도호부사로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가 되어 울산에서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593년 회령도호부사 재직 중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하자 4도체찰사 이원익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어 대구의 김응서, 밀양의 이영과 협력하여 왜군에 대항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선조 33) 4월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성채를 불태우고 야인 115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1601년에도 군사 2,500여 명을 동원하여 야인의 토벌에 나서 사살자 229명, 포로 7명의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1명도 없었다.

1603년(선조 36) 8월 경상우병사겸진주목사가 되어 우병영을 창원에서 진주의 촉석산성으로 옮기고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고, 1605년에는 길주목사에 임명되어 길주산성을 축조하였다. 1607년(선조 40) 6월 수원부사, 1608년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 1612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겸영변대도호부사, 1614년 충장위장를 거치고 1615년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어 말 1필과 삼아녹피 1피를 하사받았다. 1616년 9월 역적 이춘기 등을 체포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1617년 다시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 16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1624년 평안병사겸삼도부원수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올랐으며, 1624년 평안도병마절도사겸영변대도호부사, 1633년 삼도통제사겸경상우수사를 거쳐 1628년 형조판서겸금화제조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 9) 77세의 고령으로 남한산성수어사에 임명되어 남한산성 수축의 감독을 맡았다. 1632년 노령으로 관직을 사직한지 한 달 만에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충주 이수일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202-1번지[석교길 19]에 있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645년(인조 23) 좌의정겸영경연사에 추증되고, 1686년(숙종 12)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05호인 충주 이수일 신도비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202-1번지[석교길 19]에 있고, 진주시·성주군·통영시·수원시·경성군 등에 이수일을 기리는 비가 있다.

*디지털충주문화대전: http://chungju.grandculture.net/chungju/toc/GC0190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