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20:47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


1241(고종 29)~?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문하평리 핵(翮)의 장남이고 검교정승 진(瑱), 대제학 세기(世基)의 장형이며 정승 제현(齊賢)의 큰아버지이다.

호는 성암(誠菴). 일찍이 문과에 등제하여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276년(충렬왕 2) 2월에 전중시어사로 승진했는데, 3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설치한 장경도장(藏經道場)에 가다가 전후(殿後)에 두견화(杜鵑花)가 만발한 것을 보고 4운(四韻)을 내리어 시를 지으라 하니 공이 민지(閔漬)·백문절(白文節) 등 18 사신(詞臣)과 함께 시를 지어올렸다.
뒤에 정언에 이르렀는데, 여러 낭사(郎舍)와 더불어 말하기를 “근래 내수(內豎)로 있는 미천한 자들이 임금을 수종(隨從)한 공로로 사도(仕途. 벼슬길)가 허용되었는데, 이는 조정의 반열(班列. 위계질서)을 어지럽히는 일이요 역대숭조(歷代崇祖)의 법도를 무너뜨리는 일이니 성명(成命)을 거두시라고 주청해야겠다.”고 하니 왕이 듣고 진노하여 이미 낸 서장(書狀)을 보고자 하여 거두어오라 하였으나 낭사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조문주사(詔文主事) 유흥(柳興)을 가두고 공에게는 일을 보지 말라 하였다.

뒤에 어떤 자가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투서하였는데, 공을 비롯한 100여인이 다루가치를 모살하려 한다고 하므로 공 등을 잡아 가두고 목에 칼을 씌웠는데 조사해보니 무고(誣告)이므로 풀어주었다.

공은 성정(性情)이 굴강(倔强)하여 벼슬을 받는 관원(官員)들을 그 공과(功過)를 반드시 따져서 옳지 않으면 비록 왕명이라도 구차하게 고신(告身. 발령장)에 서명하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율학조교(律學助敎) 전자공(全子公)이 일찍이 동안(東安) 법조(法曹)로 있을 때 수뢰죄로 파직되었는데 폐신(嬖臣) 염승익(廉承益)에게 뇌물을 바치고 복직(復職)하므로 읍인(邑人) 권문탁(權文卓)이 자공의 죄를 소장(疏狀)에 써서 비서(婢婿. 첩의 사위)인 만상(蠻商)을 시켜서 첨의부기거사인(僉議府起居舍人)인 공에게 고하니 공이 염승익을 만나서 그 잘못을 나무랐다. 그러자 승익이 왕명을 조작하여 문탁을 가두고 입을 막기 위하여 만상을 죽였다. 승익의 권세는 한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드세었으므로 공이 아니고는 비록 대간(臺諫)이라 하여도 감히 그 죄를 묻지 못하였다.

백문절이 사의대부를 맡았을 무렵에는 무공세루자(無功世累者. 공(功)이 없이 세상에 걱정이나 끼치는 자)들이 많이 보관(補官)되니 낭사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왕이 누차 독촉했으나 따르지 않으므로 이에 원한을 품은 자가 좌우를 시켜 왕을 격노케 하였다.
왕이 승지 이존비(李尊庇)를 불러 사장(司狀)을 올리라 하니 첨의부장(僉議府狀)이 아닌 감찰사장(監察司狀)을 바치므로 크게 노하여 물리치고 홀치(忽赤. 궁중을 지키는 순위군) 최숭(崔崇)에게 백문절·사의(司議) 김서(金壻)·급사중(給事中) 김지서(金之瑞)·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중사랑(中舍郞) 이익배(李益培)·사간(司諫) 이행검(李行儉)·사간 이인정·정언 정문(鄭文)·장석(張碩) 등을 결박하라 명하였다. 그러자 존비가 변명하려고 왕 앞에 나서므로 왕이 낭사들을 구하려는 줄로 의심하고 꾸짖으며 제지하니 이지저(李之氐)가 나서서 아뢰기를, “존비가 아뢰고자 한 것은 감찰사장이지 첨의부장은 아닙니다. 삼감께서는 낭사들의 죄는 살피지도 않으시고 존비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첨의부는 백관(百官)의 어른인데 일개 홀치(忽赤)를 시켜서 한 밤중에 모든 낭사(郎舍)들을 결박하였으니 나라의 체통이 어찌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왕이 감찰사장을 가져오라 하여 읽어보고 뉘우쳐 모두 풀어주었다.

이상비(표암학술원정)는 <誠菴·評理의 派名에 관한 고찰>(2004. 9)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온 조정의 만조백관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데 일개 정언(正言)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잘못을 일깨워주고 또는 불의에 항거하는 대관(臺官)들의 대표가 되어 목숨을 걸고 주청하였으니 비록 직위는 정언(正言)-기거사인(起居舍人)-사간(司諫)에 머물었으나 고려의 공도(公道)를 지킨 오직 하나의 충신이었다.
문하시중을 열 번 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비정(秕政)에 빌붙어 나라를 그르치고 축재(蓄財)에 혈안이 되어 당대는 무론 후세에까지 추명(醜名)을 남긴 자들이 하나 둘인가. 그러나 공은 영달(榮達)을 마다하고 홀로 ‘언관(言官)에 머물러 흔들리는 사직(社稷)을 붙들고 직신(直臣)으로 남고자 하였으니 그 맑고 매운 단충(丹忠)을 뒷사람들이 어찌 본받지 아니할 것인가.”라고 쓰고 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인정(李仁挺)

고려후기 광주판관, 전중시사, 기거사인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이진(李瑱)의 형이며, 이제현(李齊賢)의 큰아버지이다. 아들은 이부(李榑)와 이규(李樛)로 각각 사인과 헌납에 이르렀다.

1276년(충렬왕 2)에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내수(內竪: 內僚)들이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으로 허통(許通)되어 조정의 반열을 어지럽히는 것을 첨의부(僉議府)의 낭사(郎舍)들과 더불어 간쟁하였는데, 충렬왕이 노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 때 100여 인과 공모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다루가치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278년 사간으로 있을 때에도 능력이나 공로가 없고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낭사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 사의대부(司議大夫) 백문절(白文節)·김서(金㥠), 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1280년(충렬왕 6)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첨의부의 낭사로서 고신에 서명할 때에는 반드시 공적과 허물을 따졌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5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