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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휴당공(天休堂公) 이몽규(李夢奎)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14:33

천휴당공(天休堂公) 이몽규(李夢奎)

 

1510(중종 5)~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 증이조판서 인신(仁臣)의 계자(季子)이고 명종 때의 명장 몽린(夢麟)의 넷째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특이하여 어려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혀 10세에 대의(大義)를 통달하므로 모두 국기(國器)라고 칭찬하였으며 상공(相公) 김극성(金克誠)이 사위를 삼았다.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보령(保寧)으로 내려가서 임석(林石) 사이에 서실(書室)을 짓고 ‘천휴당(天休堂)’이라 편액(扁額)했는데 나중에 그의 호(號)가 되었다.

그는 소쇄(瀟灑. 깨끗함)속에 홀로 앉아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면서 학문과 수행(修行)을 평생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 우애하였으며 물욕(物慾)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천휴당의 행장(行狀)에서 “오오 선생은 천품이 높고 일찍이 원식(遠識. 앞 일을 내다봄)에 이르고 기도(氣度. 도량)는 초탈했으며 의기(意氣)와 생각은 범인(凡人) 보다 특출하였고 일찍부터 시사(時事)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교교(皎皎. 맑고 밝은 모양)한 행실과 세상을 잘 아는 식견을 지녔으므로 탁명(濁名. 더러운 이름)에 보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귤산(橘山) 상공(相公)은 “선생은 순정(純正)한 학문, 고상한 뜻에 있어서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백중(伯仲)일 것이라”고 하였다.

백형(伯兄) 병마절도사*포도대장*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몽린(夢麟)의 상(喪)에 다녀와서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그 해 여름에 졸하였는바 향년 54세였다.

행장(行狀)은 율곡(栗谷)이 짓고 증대사헌(贈大司憲)*증성균관좨주(贈成均館祭酒)*증찬선(贈贊善)이 추서되고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천휴당(天休堂) 이몽규(李夢奎)

1510년(중종 5)∼1563년(명종 18). 조선 전기의 사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청천당(聽天堂).

조부는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이성무(李成茂)이다. 부친은 주부(注簿)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통훈대부(通訓大夫) 이인신(李仁臣)이다. 모친은 광주반씨(光州潘氏)로 절도사(節度使) 반희(潘熙)의 딸이다.

종실이었던 이모부 흥녕부정(興寧副正) 이린(李磷)이 아들이 없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양자로 들어갔다. 1540년(중종 35) 경자식년사마시(庚子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얼마 있지 않아 나왔다. 1547년(명종 2) 처가의 별장이 있는 보령(保寧)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 서실을 짓고 천휴(天休)라 명한 후에 전원에 묻혀 오직 독서와 시 짓기에 전념하였다. 이단을 배척하여 평소 풍수지리사상과 불교 및 무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고 한다.

어려서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의 기대를 샀으며, 성장하여서는 한 마을의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과 교류하였다. 생부와 양부 모두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여 사람들의 큰 인망을 얻었다고 전한다. 1563년(명종 18) 병을 얻어 그 해 6월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510_1_0016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