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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義兵) 이석(李錫)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23:32

의병(義兵) 이석(李錫)


1882~1909 한말의 의병

자는 사옥(士玉). 경상북도 청송 출신.

1896년 의병이 각처에서 일어날 때 의병으로 나섰으나 정부의 의병 해산 조치로 산에 들어갔다가 1906년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루어지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수하 좌영장(左領將)이 되고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하다가 남석문이 잡혀 처형되니 본대로 돌아갔고 마침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으며 얼마후 의병장 정환직이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 무렵 산남의진은 의병장이 없는 소수부대로 전락하여 유격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장기와 청하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에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다가 1909년 7월 불들려서 3년형을 받고 복역 중에 탈옥했다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석(李錫)

1882년(고종 19)~1909년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초장과 좌령장으로 활약한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옥(士玉). 경상북도 청송 출신. 1896년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전개되자 의병부대에 입진하였으나 의병부대 해산조치에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06년 을사의병의 일환으로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휘하에서 초장(哨長)과 좌령장(左領將)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이 붙잡혀 처형당하자 중도에서 귀대하였다.

이때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고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정환직이 청하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한편, 당시 산남의진은 의병장이 공석인 채 이미 구심력을 잃고 소규모의 유격부대로 재편되어갔다. 이에 소수의 부하만을 인솔하고 장기와 청하 등지를 진격,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이어서 울산으로 진군하던 중 일본군의 복병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 뒤 휘하의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여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던 중 1909년 7월에 붙잡혔다.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탈옥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4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