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과거/경주이씨◇인물

간옹공(艮翁公) 이익(李瀷)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21:33

간옹공(艮翁公) 이익(李瀷)


1579(선조 12)~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판관 유일(惟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고 뒤에 사서·전언·헌납·지평·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인목대비의 폐비논의가 일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예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사후에 전한(典翰)에 추서되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이익(李瀷)

1579년(선조 12)~1624년(인조 2)
조선시대 지평, 장령,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옥포(玉浦). 이자침(李自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난(李鸞)이다. 아버지는 판관 이유일(李惟一)이며, 어머니는 참봉 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직되었다. 그 뒤 사서·정언·헌납·지평·장령·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을 역임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사예와 장령 등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한(典翰)에 추증되었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5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