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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공(石灘公) 이존오(李存吾)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20:12

석탄공(石灘公) 이존오(李存吾)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율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1341년(충혜왕 복위 2)~1371년(공민왕 20)
고려후기 우정언, 장사감무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성균관대사성에 추증되었으며,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 의열사(義烈祠), 무장 충현사(忠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탄집(石灘集)』 2권이 있다.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5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