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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조(中興祖) 15세 열헌공(悅軒公) 휘 핵(翮)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6. 8. 13:33

중흥조(中興祖) 15세 열헌공(悅軒公) 휘 핵(翮)


자(字)는 만리(萬里)이고 호(號)는 열헌(悅軒)이며 초휘(初諱-처음 이름)는 타(駝)이다.

중조 14세손인 문하평리 열헌공(悅軒公) 휘 핵에 이르러 3자 9손이 모두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으므로 열헌공을 경주 이문(慶州李門)의 ‘중흥조(中興祖)’로 받들고 있다.

열헌공은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벼슬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인덕이 겸비하여 3대(본인, 아들, 손자)에 13명 중 5인(송암공 세기. 사인공 부. 이암공 관. 익재공 제현. 국당공 천)이 성균괴(成均魁)로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충렬왕(忠烈王) 때는 진(瑱- 東菴公)과 세기(世基)가 2.3위로 천장급제(天場及第)하여 황패(黃牌)를 받았고 나머지 손자들도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열헌공(悅軒公)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인정(仁挺- 誠菴公성암공)· 진(瑱- 東菴公동암공)· 세기(世基- 松巖公송암공)이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성품이 매우 엄하시었다.
인정(仁挺), 진(瑱), 세기(世基) 등 아들 삼 형제에게 친히 서책(書冊)을 직접 교육하여 모두 수석 장원(首席壯元) 시켰다.

공(公)은 문장으로서 동문선(東文選)에 들었다.

*동문선(東文選)-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시문(詩文)을 정선하여 엮은 선집.

공(公)의 세 아들(三子)이 다 문관이 되었고 세기(世基)는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맞고 네 손자가 성균(成均)에 장원으로 등제(登第- 과거시험에 급제) 하였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 12명이 훌륭하게 되니 이웃 사람들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 부러워하였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의 묵헌(默軒) 민지 선생(閔漬先生)은
「꽃송이 같은 세 아들에 다섯 손자가 모두 장원에 급제하였더니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헌공(悅軒公)은 평소에 적선(積善)을 하여 온 세상에 알려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매년 경사(慶事)를 보는구나.」라고 칭송하였다.

조문량(趙文良)이 지은 시에는
「부모를 모시고 제학(提學- 대제학 아래의 정3품 벼슬)과 문형(文衡- 대제학. 정2품)에 오른 것은 보고 듣기에 드문 일이니 어진 이를 얻음이 도리어 옛 용문(龍門)보다 낫다」하였다.
또 이르되
「열헌의 기쁨을 어찌 형용하여 말할까. 사람들이 이르기를 새로 갑과(甲科)에 오르는 손(孫)을 더해 간다.」하였다.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追贈)되었다.
배(配)이신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서사(書史- 글과 역사)를 친히 가르쳐서 모두 세상에 크게 쓰이게 하였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장자 인정은 문과를 거쳐 고려 제1의 사간(司諫)에 이르고 차자 진과 계자 세기는 충렬왕 6년(서기 1280)의 친시(親試- 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에서 각각 제2, 제3위에 올랐다.
임금이 황패(黃牌-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던 패)를 내렸으므로 세인(世人)이 이를 “천장급제(天場及第- 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장(科場)에서 급제한 것)”라 하였다.
그 뒤에 인정(仁挺)의 아들 부(榑), 진(瑱)의 아들 관(琯)과 제현(齊賢), 세기(世基)의 아들 천(蒨) 등 4명이 모두 성균시에 장원을 하니 세상 사람들이 ‘갑과 손(甲科孫- 갑과에 장원한 자식들)’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인정(仁挺)의 두 아들과 진(瑱)의 세 아들과 세기(世基)의 네 아들 등 열헌공의 아홉 손자가 모두 문과에 등제하니 당대의 명유(名儒)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세과(世科-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라고 극찬을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주 이씨 가문이 고려의 현족(顯族- 밝고 뛰어난 일족)으로 우뚝 선 것이다. 단(壇)은 전라도 고부(古阜)서쪽 연화봉(蓮花峰) 묘좌(卯坐)에 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 http://gjlee.org/dr4/men/men_list.asp